[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살구나무 여인숙/장석남

업데이트 2017-05-20 00:12
입력 2017-05-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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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여인숙/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마당에 살구나무 한 주 서 있는 바닷가 여인숙이 있다면 거기 가서 몇 년쯤 살고 싶다. 세상 같은 거 다 잊고, 말 같은 거 다 잊고, 책 같은 거 다 잊고! 외로움을 탕약(湯藥) 달여 먹듯이 삼키고 바닷가나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 쓰고 싶은 게 있어도 쓰지 않고 가슴에만 묻어 두겠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꾹 눌러 참고 있겠다. 은나라 말기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같이 은둔자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누리겠다. 간혹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사 먹고 빈 그릇은 신문에 덮어 내놓는 한가로운 생활을 애써 구한 뒤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힌다.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인의 말씀이나 곱씹으며 살겠다.

장석주 시인
2017-05-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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