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결국 파산…40년만에 꺾인 ‘수송보국’ 꿈

업데이트 2017-02-17 10:13
입력 2017-02-17 09:16
한국 원양 해운업의 시초인 한진해운이 17일 결국 ‘사망 선고’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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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 선박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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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은 창립 40년 만에 회사 간판을 내렸고,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이루겠다던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꿈도 꺾였다.

‘한진’(HANJIN)이라는 로고를 달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던 한진해운 선박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를 전 세계로 이어주던 대동맥은 반 토막이 났다. 한진해운이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곳곳에 구축한 네트워크가 한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은 1977년 조중훈 창업주가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설립했다.

출범 이듬해인 1978년 중동항로를 개척한 데 이어 1979년 북미서안 항로, 1983년 북미동안항로 등을 연달아 개설하는 등 한국 컨테이너 해운업계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1986년에는 불황에 따른 적자 누적을 이기지 못하고 첫 경영 위기를 맞았으나 조중훈 회장이 경영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해 가까스로 정상화를 이뤄냈다.

1988년 대한상선(대한선주)을 합병해 국내 ‘1호 선사’가 된 한진해운은 1992년 국내 최초로 4천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인 ‘한진오사카호’를 띄웠다.

이후 미국 시애틀, 롱비치 등 주요 항만에 전용 터미널을 세워 사세를 키우고 1995년 거양해운, 1997년 독일 2위 선사 DSR-Senator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렸다.

조중훈 회장이 2002년 11월 타계하자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고 해운업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5천750TEU급의 컨테이너선을 잇달아 인수하며 순항했다.

그러나 조수호 회장이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하고 이듬해 부인인 최은영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뒤로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지속한 글로벌 해운업 불황 속에 운임이 호황기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호황기 때 비싸게 장기 계약한 용선료로 인한 누적 손실때문에 회사 경영 상태는 계속 악화했다.

최 전 회장은 결국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넘기고 완전히 손을 뗐다. 조 회장은 2014년부터 한진해운의 경영 정상화에 매진했으나 해운업 장기 불황 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지난해 4월 25일 한진해운의 운명이 채권단에 넘어간 뒤에도 손 쓸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진해운은 용선료 협상, 얼라이언스(해운동맹) 가입 등 채권단이 내건 자율협약 조건을 이행했으나 부족 자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요구는 끝내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채권단은 8월 30일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한진해운은 이틀 뒤인 9월 1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선박 가압류 등으로 영업망이 무너지고 인력과 주요 자산을 매각한 한진해운은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로 군림하던 시절을 접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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