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임무

업데이트 2016-11-17 03:16
입력 2016-11-16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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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Commission)
-에즈라 파운드

가라 내 노래여, 외로운 사람과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 인습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도,
가서 내가 그들을 억압하는 자를 경멸한다고 전해다오,
차갑고 도도한 물결처럼 가라,
내가 폭군을 경멸한다고 전해다오,

의식하지 못하는 억압에 반대하라,
상상력이 부족한 폭군에게 반항하라,
속박을 물리치라고 말하라,
지루해 죽을 지경인 부르조아지에게 가라,
교외에 사는 부인들에게 가라,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된 이들에게 가라,
자신의 실패를 몰래 숨긴 이들에게 가라,
불운하게도 짝을 잘못 만난 이들에게,
팔려온 아내에게,
한정 상속을 받은 여인에게 가라.

미묘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가라,
미묘한 욕망이 좌절된 이들에게 가라,
…(중략)…
자유로운 마음과 정신의 유대를 옹호하라,
가서,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라.

*

Go, my songs, to the lonely and the unsatisfied,
Go also to the nerve-racked, go to the enslaved-by-convention,
Bear to them my contempt for their oppressors.
Go as a great wave of cool water,
Bear my contempt of oppressors.

Speak against unconscious oppression,
Speak against the tyranny of the unimaginative,
Speak against bonds.
Go to the bourgeoise who is dying of her ennuis,
Go to the women in suburbs.
Go to the hideously wedded,
Go to them whose failure is concealed,
Go to the unluckily mated,
Go to the bought wife,
Go to the woman entailed.

Go to those who have delicate lust,
Go to those whose delicate desires are thwarted,
.........
Speak for the free kinship of the mind and spirit.
Go, against all forms of oppres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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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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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드가 이처럼 선동적인 시를 썼어? 의아해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오래전, 나의 난삽한 독서 편력 중에 ‘가라, 내 노래여’를 발견하고 나도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국에서 에즈라 파운드(1884~1972)는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 이미지즘 운동을 이끌었던 시인이며 문예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현대 시의 개척자, 탐미적인 개인주의자이며 나치에 협력했던 시인이 ‘임무’처럼 도발적인 시를? 믿기지 않았지만 인터넷이 없을 때라 진위를 확인하지 못해 답답했었다.

‘임무’는 파운드가 시 잡지 ‘Poetry’에 1913년 발표한 시이다. 그즈음 파운드와 그의 친구들은 이미지즘을 선언했다.

오로지 언어와 재현에만 관심을 두겠다. 낭만주의의 애매한 표현, 형용사의 과도한 사용에 반대한다. 뻔한 상투어를 피하며 현대적인 목소리를 지닌 시각적인 시를 옹호한다. 그가 1912년에 발표한 이미지즘의 세 가지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대상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2. 표현에 기여하지 않는 단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3. 리듬에 대하여: 메트로놈에 의지하지 않고, 음악적인 시구의 연속에 따라 시를 구성하기.

‘이미지즘 시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라는 글에서 그는 이미지를 “순간에 지적이며 감성적인 복잡성을 전달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이러저러한 문학적 업적보다 나는 파운드의 사람됨을 더 높이 평가하며 존경한다. 그는 동시대의 중요한 작가들-예이츠, 프로스트,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그리고 TS 엘리엇-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자신의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파운드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작품은 더 훌륭하게 변모했다.

파운드의 인간성에 대해, 그의 관대함과 친절한 마음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친구들이 공격당하면 그들을 변호했고, 그들을 감옥에서 꺼내고 잡지에 글을 실어주었다.…그는 그들에게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유한 여인들을 소개했다. 그는 그들의 책을 펴낼 출판업자들을 대주었다. 사경을 헤매는 친구가 있으면 밤새 앉아서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그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었고, 누군가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를 설득해 살게 했다.”

파운드는 1885년 미국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2년 공부한 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여행하고 1908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시인 예이츠의 연인이었던 소설가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딸 도러시와 결혼하고, 문예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며 영국과 미국의 문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외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파운드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중국의 한시를 영어로 번역했다.

1924년에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이주한 파운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파시스트에 동조해 미국을 비난하는 라디오 연설을 한 반역죄로 1945년 미군에 의해 체포됐다. 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이상해진 그는 미국으로 압송돼 워싱턴DC의 정신병원에서 12년을 보낸 뒤에 헤밍웨이를 비롯한 친구들의 탄원으로 1958년 석방됐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파운드는 1972년 죽을 때까지 베네치아에서 살았다.

엘리엇은 그의 야심작 ‘황무지’(원본은 약 800행이었는데 파운드가 433행으로 줄여 주었다)를 ‘나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바쳤다. 한 시인이 다른 시인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였다.
2016-11-17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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