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무등산 자락에 안긴 의재 선생의 詩·書·畵

함혜리 기자
업데이트 2016-11-12 01:01
입력 2016-11-11 22:50

광주 의재미술관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있는 의재 미술관은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로 일컬어지는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설립된 미술관이다. 외국에는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미술관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만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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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오롯이 들어앉은 의재미술관. 고즈넉하고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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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의 맥을 잇는 의재 허백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상설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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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국립공원에 자리잡은 사립 미술관

국립공원 내의 사찰이 지닌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사립 미술관으로 유일하게 국립공원 안에 자리 잡은 것은 의재미술관이 유일하다. 의재 선생은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30년간 머물며 예술가로서, 사회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 산수 안에 누우셨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오솔길과 차밭을 오가던 ‘의재 도인’의 흔적이 곳곳에 밴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미술관은 풍성하고 너그러운 자연 속에 있기에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방문해도 운치가 있다. 의재 선생의 친손자로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허달재 화백이 의재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녹록지 않은 미술관 살림을 꾸려 가고 있다.

의재미술관(www.ujam.org)은 증심사 계곡 입구 주차장에서 도보로 계곡 산책로를 따라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대지 면적 1800평에 건축 면적 246평의 크지 않은 규모의 미술관은 차 문화교실로 쓰이는 삼애헌과 관리동, 전시동으로 구성돼 있다. 비스듬한 경사 위에 놓인 나무상자가 전시동이다. 전시동의 반투명 유리에는 무등산의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비쳐서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듯하다.

도시건축 대표 조성룡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종규 교수가 공동 설계한 미술관은 의재 선생의 올곧은 삶과 비범한 예술혼, 부드러운 무등산의 자연을 조화롭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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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들고 작품을 그리고 있는 의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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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부터 미공개작까지 ‘남도의 풍취’

1891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의재 선생은 그림에서뿐 아니라 한시와 고전화론에 통달해 시·서·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 꼽힌다.

의재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할아버지뻘인 미산 허형(許瀅·1862~1938)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산은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인 종조 소치 허련(許鍊·1808~1893)의 넷째 아들로 소치의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산도 산수에서 알아주는 화가였지만 재주만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과 학문과 인품의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데 의재는 증조할아버지뻘인 소치에 더 닮아 있다. 의재의 작품은 활달하면서도 힘찬 필묵과 깊고 맑은 동양사상, 여유로운 남도의 풍취와 시적인 흥취가 어우러져 문인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선생은 20대에 일본에서 유학한 후 귀국해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뒀지만 세속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1947년부터 무등산 계곡에 들어가 은거하며 예술가이자 계몽가, 사상가,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하늘과 땅,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은 그의 삶과 예술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였다. 그는 차 문화보급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 피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업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삶과 자연, 삶과 예술, 학문과 실천, 개인과 사회가 조화롭기를 바랐던 선생의 자취가 무등산 계곡 곳곳에 남아 있다.

등산로와 평행으로 나 있는 미술관 진입 램프를 지나 의재미술관에 들어서면 바로 뮤지엄 숍이 있고 유리로 된 왼쪽 벽은 마치 유리 병풍처럼 무등산의 자연을 그대로 보여 준다. 구름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기획전시를 위한 전시실 1, 2가 있고 다시 완만한 경사로를 지나면 상설 전시실이다.

상설 전시실에서는 의재 선생의 각 시기별 대표작과 미공개작들이 새로운 기획으로 전시되고 선생이 남긴 편지와 사진 등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의 이벤트 홀에서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 ‘우리 그림 우리 가락 전통에 취하다’라는 제목으로 국악 연주회가 열린다.

●미술관 뒤 ‘춘설다원’ 녹차는 색다른 즐거움

미술관 앞쪽의 계곡을 건너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의재 선생이 30년간 기거하면서 화실로 사용했던 작은 집 ‘춘설헌’이 있다. ‘춘설헌’은 1986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됐다. 춘설헌과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돌계단이 보이는데 그 위에 의재 선생의 묘소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선생이 조직한 시서화 동호인 모임 ‘연진회’에서 의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한 평생 산수를 그리고 산수 속에 누우신 이여’로 시작하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미술관 뒤로 1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의재 선생이 애정을 쏟아 가꾸었던 5만여평의 녹차밭 춘설다원이 나온다. ‘춘설’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된 녹차는 무등산록에 드리운 구름과 산기운을 받고 자라 그윽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춘설헌 가는 길에 있는 문향정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춘설 차 한잔을 마시는 것도 의재미술관 방문의 색다른 즐거움이다.

lotus@seoul.co.kr
2016-11-1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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