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그린 그림에… 뜻밖의 내가 묻어 나왔다

업데이트 2016-06-13 02:17
입력 2016-06-12 17:42

‘마음 감기’ 위한 그림처방 어때요… 미술 심리치료 받아보니

“상담을 받으러 온 분들께 ‘휴식’이라는 단어를 듣고 연상되는 것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집이 아니라 자연을 그려요. 두 사람도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네요. 자신도 모르게 휴식이 절박하다는 마음을 나타낸 거죠.”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향나무미술심리상담센터. 서울신문 이성원(31) 기자와 김희리(28) 기자가 미술치료를 취재하기 위해 센터를 찾았다. 체험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길은영(47) 소장에게 마음을 들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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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업무량을 바쁘게 처리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였고 가벼운 우울감을 느낀 터였다. 여행이나 독서, 잠깐의 휴식만으로는 일상의 답답함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기자 주변 사람들, 특히 직장인 대다수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 이들을 대신해 대안 심리치료를 찾아 나섰다. 미술치료, 음악치료, 독서치료 등 종류는 다양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관련 자격증만 1694개다. 이 중 미술치료를 체험하기로 한 이유는 그나마 두 기자가 다른 영역보다 그림을 조금 더 좋아한다는 개인적인 기호 때문이었다.

무심코 그린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정확하게 속내를 짚어낼 줄이야. 길 소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가 솔깃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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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 이상·현실의 조화를 조언받다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라”며 길 소장이 준 종이와 그림 도구를 받아 들고는 잠시 당황했다.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어서다. 곧 크레파스와 파스텔 중 파스텔을 집어 들고는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뾰족한 봉우리가 특징적인 산 3개를 크게 그리고 왼쪽 아래 귀퉁이에 작은 집을 그려 넣었다. 집에서 시작된 길은 3개의 산봉우리 정상과 이어졌다. 왼쪽 위 귀퉁이에 큰 태양을 그렸고 하늘은 기러기와 비행기로 채웠다. 이것저것 그리다 보니 20분이 훌쩍 지났다.

“대부분 크레파스를 집어서 그리죠. 파스텔로 그리는 사람은 정서가 메마른 상태인 경우가 꽤 있어요.” 길 소장이 그림을 집어들며 말했다.

미술치료는 진단, 설명, 분석, 해석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진단은 환자가 자신의 상태 중에 궁금한 의식이 생기는 단계다. 환자가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이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직접 그림에 대해 말하는 단계가 ‘설명’이다. 많은 환자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설명’ 단계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분석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치료사가 개입해 그림의 조형 요소, 소재, 주제 등을 분석한다. 마지막 ‘해석’은 심리학적 이론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이 갖는 근원적 혹은 사회적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기자는 처음부터 진한 색 선으로 뾰족하게 산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무, 풀 등 ‘그 장소에 있을 법한 것들’로 여백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대로 생활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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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영 향나무미술심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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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소장은 일반적으로 산의 정상은 목표를, 집은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고 했다. “작은 집에서 목표를 향해 길게 길을 냈네요.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새는 자신의 이상을 상징합니다. 이 기자는 자신의 현실적 직업과 이 직업을 갖게 된 자신의 철학을 잘 버무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한 상태예요. 삶이 뾰족한 산처럼 딱딱하게 느껴지는 거죠. 하지만 산과 비행기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건 스스로 곧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비행기와 새를 보며 그는 설명을 이었다. “하늘의 비행기와 새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건 순탄하게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다만 인공적인 꿈(비행기)과 자연적인 꿈(새)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야겠네요.”

●김 기자, 내 감정을 위로할 여유를 충고받다

역시 파스텔을 집었다. 왼쪽 위에서 중앙 부분까지 바닷물을 그렸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내 모습을 그려 넣었다. 옆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강아지가 물고 노는 작은 인형도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길 소장은 이 그림을 두고 “이 기자의 그림이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의 그림이라면 김 기자의 그림은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치료에서 그림 속 동물은 주인공의 보조자입니다. 발자국을 보니 김 기자와 강아지는 도화지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왔네요.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죠. 감정의 영역인 왼쪽 면을 바다로 가득 메운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우울감이 다소 느껴지네요.”

그는 도화지의 각 영역에 대해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구스타프 융, 조안 켈로그 등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종합해 알려줬다. 도화지의 오른쪽은 현실·이성·미래의 영역이고 왼쪽은 감정·내면·과거의 영역이라고 했다. 또 그림의 아래쪽이 현실·일상을 뜻한다면 위쪽은 이상·꿈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림 속 강아지는 17년째 키우고 있는 반려견이라고 했더니 길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바다는 가족 같은 개를 마음에 묻어야 할 때가 올 거란 불안감일 수도 있겠네요. 바다와의 거리가 가까운 건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무의식이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고요.”

그는 자기감정을 다스릴 여유도 없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고 권했다. “오랜 시간 분신처럼 함께 지낸 개는 사회적인 영역이 아닌 개인적인 영역의 ‘나’를 대변해요. 또 개 옆에 서 있는 자신을 현실보다 어린 소녀로 그렸어요. 개와 나 모두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어요. 기자라는 직업 속에서 정서적으로는 자기감정을 위할 여유가 없다는 결핍이 내재돼 있습니다.”

길 소장은 그림 속 소녀가 신은 신발에도 주목했다. 신발은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나 사회적 역할을 상징한다고 했다. “신발이 소녀의 몸에 비해 유난히 커요. 스스로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어른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죠.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림 속 개가 장난감을 가지고 온 것처럼요. 휴가 같은 물리적 유희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또 내 마음속의 ‘아이’를 죽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그리고 질문을 주고받는 1시간 30분간 길 소장은 뚜렷한 처방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피상담자가 자신을 반추하게끔 조언하는 게 미술치료의 역할이라고 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피상담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해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통상 미술치료는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불안장애 등의 치료에 쓰이고 언어 표현에 서툰 아동이나 장애인의 심리를 살피는 데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치료에는 잊거나 왜곡된 기억을 스스로 짚어내고 해석을 덧입히는 과정이 필요해요. 결국 자기에 대한 앎이 확장되는 게 치료의 시작인 셈이죠.”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2016-06-1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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