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시장상인 말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가 결국…

업데이트 2014-11-21 17:23
입력 2014-11-21 00:00

[남대문에서 들어본 한국정치의 현주소] “지금 정치는 국민을 거지로 만드는 정치”

박근혜 대통령은 여기서 산 브로치를 달고 대선을 뛰다 대통령이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기서 만두를 먹으며 경제 성장을 말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따뜻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박정희·전두환·김대중 등 전임 대통령 중 누구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진 못했다. 선거 때면 정치인들의 구두소리가 요란한 ‘핫플레이스’, 바로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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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 남대문시장의 양말 가게에서 주부들이 물건 고르는 모습을 상인이 지켜보고 있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정치권이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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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앞두고 지난 20일 찾은 남대문시장은 김장 행사가 한창이었다. 상인들과 새마을금고 직원,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 함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할 김치 5t을 담그는 시끌벅적한 자리였다. 여기서 비닐옷에 고무장갑으로 무장하고 절인 배추에 양념을 치대던 한 50대 상인은 ‘최근 시장에 정치인들이 좀 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기자 양반은 알면서 묻는 거요 모르고 묻는 거요? 볼일 끝난 사람들이 뭐한다고 옵니까. 와도 반길 사람 하나도 없어요.”

올해로 개시(開市) 600주년을 맞은 남대문시장은 하루 40만명이 오가는 유서 깊은 서민 경제의 중심지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여야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빼놓지 않고 이곳에 들른다. 하지만 지난 6·4지방선거 이후 5개월여 동안 정치인들의 악수 공세는 뚝 끊겼다. 상인들은 “새삼스럽지도 않고 정치인은 관심도 없다”며 덤덤해했다. 하지만 각종 ‘정치 현안’ 얘기를 꺼내자 상당수 상인들은 표정이 달라졌다. 이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 무능에 대한 질타를 ‘폭주’ 수준으로 쏟아냈다.

“우리 세금으로 공무원 배만 불려? 공무원연금 개혁이 가장 시급한 현안”

남대문시장에서 만난 상인과 장을 보러 온 시민 등 52명에게 ‘가장 처리가 시급한 정치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여기 답한 39명 중 18명은 ‘공무원연금 개혁’이라고 답했다. 정부·여당이 ‘연내 처리’를 목표로 입법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공무원 단체는 극렬히 반대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이곳 사람들은 공무원연금 개혁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특히 상인들은 공무원연금에 대해 ‘적개심’ 수준의 불만을 드러냈다. 카메라 수리점에서 안내 업무를 보는 이경승(40·여)씨는 “공부한 사람들이 다들 공무원하려고 하는 게 결국 노후에 연금받고 살려고 그러는 것”이라며 “공무원들도 소수 일하는 사람만 일하고 나머지는 다 논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공무원들 배만 불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들 역시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경기 남양주시에 살면서 1년에 네댓 번 이곳을 찾는다는 이지선(45·여)씨는 “박봉, 박봉 하는데 공무원들은 지들만 박봉인 줄 아는 모양”이라며 “다들 박봉인데 공무원연금도 국민연금과 수준을 맞추는 게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인은 순 도둑놈들? 일한 만큼만 돈 받아라”

이어 많은 응답이 나온 건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7명)였다.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와 새정치민주연합 정치혁신실천위원회 등 여야가 추진 중인 혁신 작업이 언론을 통해 자주 다뤄진 만큼 상인·시민들은 상당한 관심을 표했다. 특권 내려놓기가 시급하다고 답한 상인·시민들은 특히 거의 전부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며 국회의원들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남대문시장에서 40년간 시계 장사를 했다는 한 70대 상인은 “장사꾼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도 일당을 벌까 말까 한데 국회의원은 하는 일보다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며 “노동해야 돈 버는 거다. 돈 벌려면 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출석을 따지든지 법안 수를 따지든지 일한 만큼 합당한 보수를 받게 하고 안 하면 안 한 만큼 월급도 디시(DC·디스카운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상인들 중에는 “순 도둑놈들이다. 전부 다 내놔야 한다”고 막연한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 말 저 말 필요없고 공약만 지켜라”

상인·시민들은 구체적인 현안 대신 소박하게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 달라’, ‘경제를 살려 달라’는 바람을 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30년 경력의 인삼 판매상 조혁복(63)씨는 “이거다 저거다 말할 거 없이 내세운 공약이나 잘 지키면 된다”고 일축하기도 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무상복지 논쟁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모르겠다’며 답을 피했다. 다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17명 중에는 ‘선별적 복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13명으로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한다’고 답한 4명보다 월등히 많았다.

남대문시장은 선거를 주기로 정치인들이 밀물·썰물처럼 드나들다 보니 상인들 중에는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서민 이미지’를 껴입는 데 시장이 이용만 당한다는 자괴감을 토로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 입맛대로 오가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작 남대문시장을 지켜온 상인들과 시민들이 ‘환영’하는 정치인은 누굴까.

이 질문에 답한 36명 중 가장 많은 10명이 뽑은 인물은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 주로 ‘시민들과 소통을 잘할 것 같다’, ‘서민의 삶을 잘 이해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박 시장을 남대문시장에 불러놓고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사업’ 문제를 따지고 싶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고가도로가 폐쇄되면 상권이 타격을 받고 노점상 철거 등 환경 정비의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마침 이날 이 문제로 서울시청까지 방문했다는 한 노점상은 “여기 공원을 만들면 우리는 당장 어디로 가라는 건지 어떻게 장사를 하라는 건지 박 시장에게 속 시원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시장 사람들의 애증

박 시장에 이어서는 7명이 박 대통령을 언급했다. ‘실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기를 잘 살릴 것 같다’는 이유로 6·4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나왔다 낙선한 새누리당 정몽준 전 의원을 뽑는 경우도 4명이 있었다.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한 상인은 “혁신 작업에 참 공감이 간다”며 새누리당 김문수 보수혁신특별위원장을 뽑았다.

지난 9월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한 상인이 ‘정치인들은 명절 때만 시장에 온다’고 하자 “그럼 시도 때도 없이 와야 하느냐”고 날을 세웠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뽑은 건 1명이었다. 대신 김 대표는 ‘남대문에 오지 말았으면 하는 정치인’을 묻는 질문에는 2명에게 호명됐다. 남대문시장에 오지 말았으면 하는 정치인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건 박 대통령(5명)이었다. ‘서민을 모른다’, ‘소통이 안 된다’는 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나머지 상인·시민들은 특정 정치인을 꼽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누가 다녀가도 바뀌는 건 없다는 회의감 때문이다. 50년을 넘게 이곳에서 땅콩을 팔며 정치인들을 봐 왔다는 80대 상인의 말이 이곳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압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 시장? 다음 대통령 후보? 다 소용없어. 진짜 남대문시장에 왔으면 하는 정치인은 약속을 잘 지키는 정치인, 그거 하나뿐이야.”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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