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16 >성폭력 편견과 진실

업데이트 2014-11-11 17:36
입력 2014-09-01 00:00

심하게 노출한 네 탓!… “무덤까지 비밀로” 쉬쉬! 성폭력 피해 여성, 두번 운다

#1 15살 소녀가 집에서 친척 오빠에게 강간을 당했다. 피아노를 치던 엄마에게 딸이 다리 사이로 피를 흘리며 다가가 울며 말한다. “엄마, 나 아파. 오빠가 그랬어. 나 배가 너무 아파.” “니가 조신하지 못하니까 그런 짓을 당하지. 소문 날까 창피하니까 입 다물어.”

이나영이 출연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나오는 장면이다. 딸이 아프다고,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엄마는 딸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소문 나지 않도록 다그치는 데 급급하다. 이나영에게는 성폭력을 당한 것 자체보다 강간당한 자신을 다독여주지 않은 매정한 엄마가 상처로 남아 버렸다.

#2 “엄마 나 사실 지금까지 아빠랑 그런 일(성폭행)이 있었어. 아빠가 비밀을 지키라고 했어.” “네가 유혹했니?”

자상한 사업가와 현모양처 주부,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 구성된 행복한 가정에서 어느 날 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엄마에게 불쑥 던진 말에 엄마가 보인 반응이다. 오랜 세월 피해를 입어 온 여학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다큐멘터리 영화로 여성인권영화제에 출품된 ‘잔인한 나의 홈’ 스토리다. 엄마는 이후 남편의 편을 들며 딸의 주장을 의심하고 묵살한다. 피해자가 엄마와 동생을 걱정하면서도 아버지를 처벌하는 것이, 속고 있는 엄마와 여동생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버지를 고소, 유죄판결을 받게 한 결과는 엄마의 냉대와 동생과의 연락 두절이었다.

동생은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성폭력이 발생할 경우 “이야기하면 가족의 행복이 깨질 거야, 무덤까지 비밀이다”는 식으로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정의 평화를 우선시하고 피해자를 의심하며, 가해자는 빠진 채 피해자들끼리 다투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이같이 성폭력에 대해서는 잘못된 사회통념이 많다. 편견과 진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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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전적으로 가해자 책임

성폭력의 경우 남성의 성충동을 자극한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잘못된 사회통념이 존재한다. 남성의 성충동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성의 심한 노출과 부주의한 행동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이유에서다. 집단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가해자가 대부분 ‘피해자가 유혹했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가 미모인 경우 등 이른바 ‘꽃뱀’에게 당했다는 식의 논리는 피해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본질을 호도할 뿐 아니라 2차 피해마저 유발한다. 이 같은 피해자 유발(책임)론은 여성이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고 올바르게 처신하면 성폭력은 사라질 것이라는 엉뚱한 논리로 이어진다. 이는 남성이 결정하면 여성은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는 유교식 남존여비 악습의 잔재다. 우리 사회에는 남성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느니, 참지 않아도 된다느니 등 남성의 공격적인 성적 행동을 남성다운 것으로 부추기는 나쁜 경향이 일부 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는지 여부다. 가해자의 의도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자신의 성적 충동이 아무리 강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한다. 살인, 강도와 마찬가지로 성폭력도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 판결(1992년)은 피해자가 허락하지 않는 성적 접촉은 물리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폭력성을 내포한 것으로 성폭력임을 인정한 바 있다.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 85%로 가장 많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3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상담 1418건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5%로 가장 많고, 모르는 사람 8.1%, 미상 6.9%다. 성인은 ‘직장 관계자’ 29.8%, ‘친밀한 사람’과 ‘주변인의 지인’ 각 11%, ‘학교 관계자’ 10.1%의 순이다. 청소년(14~19세)은 학교(27.8%), 친족(13%), 학원 관계자(9.9%) 순이다. 어린이(8~13세)와 유아는 친족과 친·인척을 합한 성폭력 피해가 각 57.4%, 50%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동네사람이 각 8.2%와 14.6%를 기록했다.

성폭력은 여성 혼자서 밤늦게 어두운 골목길을 다니다가 괴한에 의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으니 일찍 귀가하고 문단속을 잘해야 한다는 사회통념과 달리, 신뢰를 토대로 형성된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가벼운 성희롱이나 성추행에서 시작해 경험의 연속선상에서 심한 추행과 강간 등으로 진전되기 쉽다. 성폭력은 왜곡된 성문화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권력관계에서 생겨난다. 여성, 어린이 등 약자를 골라 차별, 비하, 경시,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대부분인 성폭력 가해자는 정신 이상자도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성별은 여성이 94.4%로 압도적이고 남성도 점점 늘어 5.6%다. 성별, 연령별 피해자는 성인 여성 66.5%, 여성 청소년 14.4%, 여성 어린이 8%, 성인 남성 3.3%, 여성 유아 3% 순이다. 61세 이상 노인 대상 성범죄도 5년간 76%나 급증했다. 가해자는 성인 남성 78.9%, 남성 청소년 8.5%, 성인 여성 3.4% 순이다.

●여성이 거절 땐 강압적 요구 말아야

음란물은 폭력적인 성관계를 미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음란물을 자주 접하는 경우 상대방이 싫다고 해도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성관계를 하는 것이 남성적인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여성들이 처음에는 “안 돼요”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돼요”라고 한다는 식의 유머도 오해를 부추긴다. 데이트 상대든 누구든 싫다고 말하면 싫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명시적 허락이 없으면 암묵적 동의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침묵이 사실상 동의는 아니다. 남성이 밤늦게까지 술 먹는 것이 성폭력을 의도한 것은 아닌 것처럼, 여성이 밤늦게까지 술을 먹었다고 성폭력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부부도 서로 동의해야 성관계 가능

부부 사이에는 서로 성교 요구에 동의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부부간 강간은 있을 수 없다는 사회통념과 달리 부부 사이에도 협박과 폭행 등에 의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 강간을 인정하는 판례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가해자가 본인의 행동이 성폭력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성폭력의 지름길인 만큼, 매사에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언어든 행동이든 타인의 동의를 받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happyhome@seoul.co.kr
2014-09-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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